2026년 9월 21일

흉년

묵상

흉년은 심지 않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심었는데 나지 않는 것이다. 갈았고 뿌렸고 기다렸는데 거둘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흉년은 게으른 사람보다 부지런한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 할 만큼 했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다.

인생에도 흉년이 있다. 잘못한 것을 찾아봐도 안 나오는데 거둘 것이 없는 시기가 있다.

흉년이 그를 내려가게 했다

야곱에게 그런 해가 왔다. 흉년이 들었고, 양식이 떨어졌고,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냈다. 그리고 결국 야곱 자신이 내려갔다. 그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니다. 흉년이 그를 내려가게 했다.

자식의 흉년이 먼저 들었다. 야곱은 요셉을 잃었다. 아니 잃은 줄로만 알았다.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러 간 그 땅에 그 아들이 있었다.

먼저 내려가 있던 아들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세기 45:5)

팔려 간 것이 보내진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할 때 흉년은 끝나지 않았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창세기 45:6)

이 년이 지났고 오 년이 남았다. 한복판에서 한 말이다. 다 지나간 뒤에 돌아보며 한 말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멈춰 제사를 드린다. 그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세기 46:3)

하나님은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야곱이 두려워 했기에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다. 가나안이 아니라 거기서다. 흉년을 피해 내려가는 그 땅에서.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창세기 46:4)

하나님은 함께 내려가겠다고 하신다. 안 내려가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신다.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흉년이 없었다면 야곱은 가나안에 남았을 것이다. 내려가지 않았다면 민족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짐작이다. 성경이 그렇게 적어 두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족이 내려갔고, 하나님은 거기서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다.

흉년이 길이었다

전에 기다림을 두고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시간을 늘이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넓히시는 것이다.

그때는 늦어지는 시간을 두고 쓴 문장이었다. 오늘은 없어지는 것을 두고 같은 문장을 다시 쓴다. 흉년은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는 것이다. 곳간이 비고 계획이 비고 기댈 곳이 빈다. 그 비는 것이 나를 넓히는 것이라면, 나는 그 말을 아직 다 못 믿는다. 늦어지는 것은 그래도 기다리면 되는데, 없어지는 것은 기다릴 대상이 없다.

그런데 야곱을 보면 흉년이 길이었다. 그를 옮긴 것은 부르심이 아니라 결핍이었다. 하나님은 그 결핍을 치우지 않으시고 그것을 타고 그를 옮기셨다.

요셉은 나중에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세기 50:20)

그런데 이 말은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뒤에 나온 문장이다. 긴 세월이 다 지나간 자리다.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않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이 애굽에 도착해 바로 앞에 선다. 아들이 총리다. 좋은 땅을 받는다. 섭리가 다 맞아떨어진 자리다.

거기서 바로가 나이를 묻는다. 야곱의 대답은 이것이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세기 47:9)

험악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지키셨고, 인도하셨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데,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험악했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믿음없는 고백같이 보인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말을 지우지 않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마음이 놓인다. 섭리 안에 있으면서도 험악했다고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흉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흉년이 나를 어디로 옮기고 있는지는 모른다. 옮겨지고 있는 중인지, 그냥 비어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그 밤에 들었다. 멈춰 선 자리에서 들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지금도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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