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9일
지연, 늦추심이 아니라 넓히심
묵상
기다리는 것이 있다. 무엇인지는 여기 적지 않겠다. 다만 오래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적는다.
기도했고, 응답은 아직이다. 처음에는 곧 오려니 했다. 그 다음에는 왜 안 오는지 물었다. 지금은 묻는 것도 지쳐서 그냥 하루를 산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본다. 늦다. 내 계산으로는 분명히 늦다.
늦는 것 같은 시간이 괴로운 이유는 침묵 때문이다. 안 된다고 하시면 차라리 접겠다. 그런데 안 된다는 말도, 된다는 말도 없이 시간만 간다. 그 사이에서 나는 내가 잊힌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목사도 그런 의심을 한다. 아니, 목사라서 더 하는지도 모른다. 남에게는 기다리라고 말해 놓고 나는 못 기다리고 있으니까.
더딜지라도
하박국은 나보다 먼저 이 자리에 있었다. 그가 들은 말은 이것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박국 2:3)
더디다, 그런데 지체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이 두 마디가 모순처럼 들린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더딘 것은 내 시계고, 지체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시계다. 시계가 두 개다. 그 사이의 간격이 내가 견디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다. 성경은 사랑하셨기 때문에 머무셨다고 말한다(요한복음 11:5-6).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이틀은 오빠가 죽어 가는 시간이었다. 예수님에게 그 이틀은 더 큰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같은 이틀이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지연이고 한쪽에서는 계획이다.
지연이 거절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아는 것과 견디는 것은 다르다. 견디는 쪽에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결과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모른 채 그분의 시계를 신뢰하는 것이다.
딜레이라는 말
delay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이 말이 라틴어 dilatare에서 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dilatare는 '넓히다, 펼치다'라는 뜻이다. dis-(널리)와 latus(넓은)가 합쳐진 말이다. 이 견해대로라면 delay의 뿌리에는 '늦춤'이 아니라 '넓힘'이 있다.
정설은 아니다. 사전들은 대체로 옛 프랑스어 delaier, 곧 de-와 laier('두다, 남겨 두다')에서 찾는다. 그 laier를 라틴어 laxare('느슨하게 하다')로 이어 보는 견해도 있고, 게르만어 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 나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런데 어느 쪽을 택해도 내게는 위로가 된다. 지연의 뿌리가 '넓힘'이라면, 늦어지는 시간은 나를 넓히시는 시간이다. 지연의 뿌리가 '느슨하게 함'이라면, 늦어지는 시간은 내가 움켜쥔 손을 풀게 하시는 시간이다. 라틴어에서 '넓히다'(dilatare)와 '미루다'(differre의 분사 dilatus)가 같은 소리를 가졌다는 것도 우연 같지 않다. 미루어진 것은 넓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시간을 늘이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넓히시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기다리는 자리가 조금 달라진다.
빠르게 가느라 못 보는 것
지난 글에 나는 빠른 사람이라고 적었다. 그 속도가 여기서도 문제다.
빠르게 가는 사람은 앞만 본다. 앞만 보면 길은 보이는데 숲은 안 보인다.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옆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못 본다. 조급함은 시야를 좁힌다. 좁아진 시야로는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의 전체가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늦는다고 느낀다. 사실은 늦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범위가 좁은 것일 수 있다.
나사로의 자매들도 그랬다. 이틀이라는 시간 안에 갇혀 있었다. 예수님은 그 이틀 너머를 보고 계셨다. 나는 여전히 이틀 안에 갇혀서 시계를 본다. 이것이 나의 연약함이다. 고치겠다고 다짐하기보다 그냥 고백한다. 그래야 정직하다.
기다리는 자리에서
이전 글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조급하다고 해서 앞당길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훨씬 더 많다.
그때는 조급함을 말하려고 쓴 문장인데, 지금 읽으니 기다림을 말하고 있다.
응답은 아직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렇게 정리한다. 이 지연은 거절이 아니다. 이 지연은 넓힘이다. 내가 좁아서 못 보는 것을 보게 하시려고, 내가 움켜쥔 것을 놓게 하시려고 시간을 쓰고 계신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14)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시편이다. 한 번으로는 안 되는 것을 시인도 알았던 것 같다. 나도 두 번 읽는다. 그리고 오늘도 기다린다.